𝑻𝒉𝒆 𝒐𝒏𝒍𝒚 𝒐𝒏𝒆 𝒘𝒊𝒕𝒄𝒉.

[그리고 단 하나의 마녀.]

 

 " 사랑할 사람을 선택할 순 없어. "

 

 

-팔다리는 뼈마디가 얄상하게 드러났고, 표정에는 각박한 삶의 흔적들이 속속들이 남아있다. 짧게 잘랐었던 머리는 몇 년 전부터 다시 기르기 시작해서, 아래로 묶어 내린 지금 허리 아래까지 아슬하게 닿는다······. 써머 파운야드가 한여름밤 꿈의 박제였다면, 에스텔 파운야드는 변화한 세월의 방증 같은 사람이었다. 

-우습게도… 졸업 후로도 반 마디가 더 컸다. 정말 끝이란 건 없는 걸까? 

 

 

-오른손 검지에는 로즈와 맞췄던 얇은 실버 링과 흰 장갑, 손목에는 체인이 끊어져 팔찌로 개조한 목걸이 하나. 화상 흉터가 적나라하게 남아있는 왼손 약지에도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다. 목에는 오래 전부터 걸고 있었던ㅡ보존 마법이 걸려 있다ㅡ별자리 목걸이 하나, 또 왼쪽 어깨에서부터 팔뚝 언저리까지 닿는 돌고래 모양 타투……. 베이지색 민소매 셔츠와 갈색 투피스를 걸친 옷매무새는 단정하나 어쨌거나 죽으러 나온 사람 치고는 제법 차림새가 화려하다.

 

 

 𝐒𝐮𝐦𝐦𝐞𝐫 𝐅𝐨𝐮𝐧𝐝𝐲𝐚𝐫𝐝 써머 파운야드

혼혈

키르켄

24세•여성

173cm / 51kg

영국•미국 이중국적

 

 

“별거 없어. 이 세계에는 아직 마법이 필요하거든.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 뿐이야."

 

 

 

단풍나무Maple | 유니콘 털│13.5inch

유연하고 탄력 있는 지팡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뒤 은으로 도금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마침내 품에 가둬두는 것이 익숙해졌다.

 

𝐏𝐄𝐑𝐒𝐎𝐍𝐀𝐋

마모된 희망•직설적 친절•포기하지 않을 것들

인생을 180도 전환하는 터닝포인트 따위는 없다. 모든 불행에는 전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숱한 절망 속에서도 그가 자기 자신을 유지했음에 이상할 점은 없다.

절망 속에서도, 그의 곁을 지켜왔던 것들.

비가역적인 운명, 아주 손쉬운 사랑, 포기할 수 없는 문장, 스스로를 유일하게 구성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마녀.

 

마모된 희망

고저가 없고 침체된 섬처럼 가라앉은 텐션을 유지한다. 호기심은 닳아 없어졌고, 짜증은 약간 늘었지만 분노는 사라졌다. 이유는 간단하지. 긍정을 지탱하던 희망이 닳아버렸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졌으니 땅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한때 모든 말에서 낙관과 희망을 찾아내던 삶 속에 살았던 그는 어떤 말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세상 속 기거하는 것을 괴로워했으나, 이윽고 익숙해졌다. 전부 마신 찻잔 아래 남겨진 찻잎처럼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 삶의 눈부신 면들을 너무 빨리 선행해버린 탓이라 여기니 납득이 쉬웠다. 

늘 그랬듯 도통 끈질기지 못하다. 행운을 유지하는 것도, 불행을 타파하는 것도.

 

이런 인생으로 운명이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 괘씸하지만, 또, 그렇다기엔 에스텔 파운야드는 써머 파운야드의 인생을 너무도 사랑했던 한 명의 사람을 알고 있었다······.

 

직설적 친절

그러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삶 속에서도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던 진실됨만큼은 잊지 않아서, 할 말을 주저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다. 서슴없다. 거침도 없지. 에둘러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 같이 굴었다. 

물론 각별히 불만이 늘었거나 돌연히 시니컬해졌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으나, 아껴왔던 모든 것들을 소중한 상자 속에 숨겨두자 곁에는 부정과 분노만이 남게 되었다. 어스름을 가두어 버렸으니 마법 같은 언사도 자연히 사라졌다. 웃음이란 거품이 빠져나갔고, 내보일 일 없던 이름 하나가 드러났다.

 

어쨌거나 에스텔은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싫은건 싫다고, 좋은건 좋다고, 맞는건 맞고 아닌 건 아니라고······. 사실 이런 건 희망과 별 관련이 없다. 어떤 절망도 앗아갈 수 없었던 본질같은 것이다.

 

 

또한 잘 대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눈물로 얼룩진대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습관처럼 누군가의 밝고 눈부신 면이나 사랑스러운 지점들을 시선 끝으로 좇는다. 그것을 입밖으로 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주 오래 전부터 몸에 익었던 친절함이 남아 있다.

아주 약간의, 부러움과······. 사랑이, 무사했으면 하는 마음.

 

한때는 자신 또한 영위했었던 것들이 무사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그의 친절이다. 

 

 

포기하지 않을 것들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하는 것 뿐이다. 이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별 수 없이, 대단한 마음도 없이, 그래도….

 

마법.

또한 마법을 싫어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마저.

 

좋아했던 풍경과 세계,

운명,

그리고 당신까지.



 

𝐎𝐓𝐇𝐄𝐑𝐒

𝐄𝐬𝐭𝐞𝐥𝐥 𝐒𝐮𝐦𝐦𝐞𝐫 𝐅𝐨𝐮𝐧𝐝𝐲𝐚𝐫𝐝 에스텔 써머 파운야드

Estell |  본래 에스텔,이라고 읽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에스텔, 라- 라고 길게 발음을 빼 발음한다. 써머 파운야드라는 마법사의 존재가 일파만파 퍼지자, 대외 활동이 필요할 땐 비교적 잘 사용하지 않았던 이름을 전면에 내걸었다.

 

Summer | 부르는 사람이 다수 사라진 이름. 사라지거나, 죽었거나, 잊혀졌거나. 빛나던 힘을 잃었다.

 

Foundyard | 사랑보다 염려가 앞섰으나, 그는 결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이름으로 남았다. 

-나는 언제까지나 파운야드로 남을 거야. 엄마… 아빠.

 

 

───────어떤 기록. 1998. 12. 31. 이전까지.

직업_ 스무살 9월, 엄마의 이름과 연인의 성을 따 지은 활동명 캐서린 그레이로 발매했던 앨범 ‘Yours Truly’가 영국과 미국 전역에서 히트를 쳤다. 다만 그는 스타덤에 오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여전히 앳된 모습 그대로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콘서트나 라디오 출연 등의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서서히 원히트 원더 가수로 잊혀졌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노래가 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파크 애비뉴 위를 운전한다······.

생소한 이름이었으나 목소리는 해묵지 않았으니 7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면 뒤돌아볼 법한 노래였을 것이다. 여전히 마법처럼 빛이 나던 어투였다.

이후로, 활동은 없었으나 아예 손을 놓지는 않았고… 앨범으로는 엮이지 못한 몇 곡을 더 썼다. 스물셋 초봄까지 각각 다른 가명을 걸고 싱글로 발매했다. 

 

 

연인_ 뼈저린, 사랑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저버리고 그를 택할 수는 없었다. 영원한 꿈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토록 빛이 나던 사람을······.

좋다. 핑계다. 사랑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자신의 잘못이 뒤따라와 이제는 그 얼굴마저 쉽게 그려보지 못한다. 물에 젖었던 청회색 머리카락, 멋진 미소. 은퇴 이후 선수들을 가르치던 좋은 코치, 좋은 아들, 좋은 연인….   

유언_ 그의 유산은, 런던 한가운데에 1평 남짓한 작은 묫자리 하나를 사는데 썼다. 묻을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린 시절 치던 기타를 존 대신 묻었다. 

7월 4일_ 왼손 약지에 낀 결혼 반지. 그것만큼은 도무지 두고 올 수 없었다.

 

 

집_ 스물셋 11월, 존의 장례 이후 영국 런던으로 돌아왔다. 당연한 일이었고 감당할 몫이었으나 알아보는 사람들이나 종종 듣게 되는 비난, 시선 같은 것들이 넌더리가 났다. 가족을 뼈저리게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해지는 날도 있었다. 숱한 고민 끝에 그는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이제 그 집에 써머 파운야드의 흔적은 없다. 집 뿐만이 아니다. 물결 같던 열한살 소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사랑하던 겨울의 풍경에서도, 바닷바람을 가르며 웃던 그 해변가에서도, 시야 어디에도······.

가족_ 더 이상 그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에스텔 파운야드의 고향이다. 집이고, 또 가족일 것이다.

그리고······. _ 써머라는 ‘사람’을 아는 존재 중 기억을 지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존의 부모님이었다. 에스텔 파운야드는 안다. 그들에게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원망 한 번 건네지 않았지. 

 

 

마법_ 필요하다. 돌려줘야만 한다. 받아들였다.

에스텔의 유일한 동기부여란 바로 저것이었다. 세계에는, 마법이 필요해. 그 진실만이 그를 살게 하고, 또 죽게 했다.

패트로누스_ 돌고래. 졸업 이후로 성공해본 적 없다. 무너져가는 건물 앞에서 그는 어떤 행복의 자락도 떠올려내지 못했다.

 

 

Circĕn

‘선택’을 강행한 것이 스물셋 겨울 즈음이었으니, 마법부의 밑으로 들어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목적은 합일했으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소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쓰고 버릴 패로, 땅에 뿌릴 거름으로 여겨진다면 자신 또한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이 있는가? 마법 정부 소속 한정으로 약간의 다혈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래저래 떠들어대는 자식들에겐 이골이 났다.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이곳의 소속이라 여기지 않으므로 희생자로서 얻을 수 많은 대다수의 특권을 포기ㅡ가족의 신변 안전을 제외하고ㅡ했다. 늘 두문분출하고 있는 듯 마는 듯 하니 그들 밑에 있음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는 종종 재해 후처리를 돕고 있지만, 빈도가 뜸해 무직이라 보는 것이 옳다. 적당히 굶지 않을 정도로만 일했고 남은 시간에는 에이스와 미뤄왔던 마법 공부를 해왔다. 이제서야 배우고 싶은 마법이 생겼다는 게 우스운 일이다.

 

 

ETC.

9월 12일, 내리쬐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스멀스멀 가시기 시작할 무렵 태어났다. 그날 유달리 파도는 높게 쳤고...

Clematis | 당신의 마음은 진실로 아름답다

Sapphire | 성실과 진실

 

-목소리는 높으나 건조한 어조 덕에 밝은 모습이 많이 묻힌다. 평이하나 힘 있게 말을 끊어내는 습관. 영국식 억양이 드문드문 묻어나지만 여전히 발음이 둥굴다.

-연주하지 않는 기타.

-무취.

-취미 전무, 저혈압과 통일성 없는 생활 습관.

-무기력증. 그런 지 좀 됐다.

 

L: 좋아하던 것들, 모두 그대로 좋다. 클래식 연주, 남색 파자마, 자기 가족과 친구들, 연인, 기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어쨌거나 좋아해왔던 모든 것들. 그리고, 그리고······.

H: 죽음을 입에 가볍게 담는 사람. 여전히 싫다… 앞으로도 좋아질 일 없을 테고.

 

 

──────────────────────────────

 

없어.

 

하지만 들려줄 곡 하나만큼은 남겨두고 있을게.

세기의 끝에서.

세기의 끝으로

https://youtu.be/eciih6MmZk4

 

1

7월 6일, 깊은 새벽.

존은 옆 건물의 무너진 계단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잔해에 짓눌린 채로 문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은 모습은 너무나 엉망이라, 품 안에 소중히 넣어둔 반지 케이스가 아니었다면 나조차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온몸을 희생해 가리키고 있던 문은 탈출용 비상구나 옥상 문 따위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존의 지시를 따라 물과 산소호흡기가 들어있는 창고로 대피한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건물은 보다 크게 재앙에 휩쓸렸으므로 마땅한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눈길을 주지 못했으나 활로가 예진작 막혀있던 탓에 보지 않아도 선택지는 아주 명료했을 것이다. 7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불 타 죽거나. 이곳의 수색이 가장 늦어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누구도 이 건물에 생존자가 있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내가 뛰어들어간 그 건물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존이 있는 방향을 향해 주문 한 번을 외치지 못했으나 나의 관할 아래 들어온 사람들에게만큼은 충실했다. 죽게 둘 수는 없다, 고 생각 했던 것 같다. 나로 인한 재해야, 나로 인해 휩쓸린 사람들이니, 죽게 둘 수는 없다고.

 

아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존을 ‘포기’한 상황의 보상으로 나는 그들의 생존을 원했다. 얻어야만 했고. 필요로 했지. 나는 아주 오래 마법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지만 그게 마지막 마법사로서의 탁월한 재능이나 나의 넘치는 힘까지 지워버리지는 못해서, 상황을 갈마무리하는 것에는 예전처럼 단 네 글자만이 필요했다. 

 

아주 오래전,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방패를 부른 적 있었다.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에, 이 모양과 비슷한 푸른 빛을 불러낸 적도 있었다.

나의 몸이 지팡이 휘두르는 방식을 기억했고 나의 입이 주문을 떠올려냈다. 그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존에게 패트로누스 한 번을 보내지 못했다…….

 

짧은 순간이었다.

프로테고, 방벽이 쳐졌고, 건물의 진동은 더 이상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물론 마법을 유지한 채로 사람들을 업고 빠져나가는 건 꽤나 까다로워서 마법의 힘이 한 톨이라도 부족했거나 운이 아주, 아주 조금만 더 나빴더라면 모두가 고비를 넘겼을 테지만, 

어쨌거나 나는 특유의 행운아처럼 살아남았다. 모두가 살았다. 빠져나온 전원이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운명이 그와 함께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단 하나. 존을 제외하고는.



지진이 멎고, 불이 꺼진 뒤, 무너진 건물 속 그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며칠 뒤 일대를 순찰하던 나로서는 이곳에서 존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몇 해간 쓰지 않은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이 근방을 수색한 이틀 동안 한평생 사용한 것보다 많은 마법을 사용했는데, 반지 낀 그 빠져나온 손을 보자마자 다시 모든 주문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힘으로는 절대 그 시신을 짓누르는 돌덩이를 옮길 수 없으리란 생각에 이윽고 다시 지팡이를 꺼내들긴 했지만, 어쩌면 무수한 불확실 속에서도 나는 그가 나의 연인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난간에 고개를 눕히고 살펴본 그 사람은 온 얼굴에 쓰린 생채기와 그을음이 묻어 난장판이었고, 몇 번이고 넘어진 듯 바지의 무릎 부분이 모조리 닳아 있었다. 숨을 막고 있었을 법한 손수건은 물기가 바짝 마른지 오래였다. 

이 메마른 남자에게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것이 있다면, 왼손 약지에 낀 반지였다. 은빛 링 한가운데에 박힌 파란색 사파이어가 꿈결처럼 고아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넘기면서도 부디, 부디 이 남자가 존 그레이가 아니기를 빌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사람만이 아니기를 원했고.

나로 하여금 써머 그레이의 꿈을 꾸게 만들었던 그 자가 아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그건 존이었다. 내 마음의 부정이 곧 그 증거가 됐다. 정말로, 꿈에 그리던 그 애가 눈을 감은 채, 엉망이 된 건물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몇 개의 왜, 가 필요했다. 왜? 왜 이 애가 이곳에 있는 거지? 바로 옆 건물이래도 약속 장소였던 파티룸과 이곳 사이는 간격이 넓고 창문의 높이가 엇갈려서 쉽사리 건너오는 건 불가능했다. 존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직접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이 건물 안으로 뛰어드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돌아온 걸까?

 

다만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어째서 내가 그 코트를 입고 싶었는가, 와 같은 무게의 가벼움을 지녔다. 대답을 결코 모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다 알면서도 질문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진실을 깨달은 순간 눈물 한 방울이 흘렀으나 이것은 결코 ‘존을 포기한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을 얻은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날 내가 오른쪽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지 않았음에 대한 안도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조금….

 

서글퍼졌었던 것 같다.

우리는 고작해야 이런 방식으로밖에 서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원하지 못할 꿈과 뒤돌아보지 않는 고개만으로.



 

2

장례식은 일주일 뒤인 7월 11일, 센트럴 파크에서 치러졌다. 식장은 존의 지인과 대학교 친구들, 학생 선수들, 선수 시절 동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나는 정말이지 나가고 싶지 않았으나 남겨진 그레이 부부를 위해서라도 간신히 얼굴을 비췄다. 식의 첫날부터 다음날 가까운 지인 몇 명을 간추려 열 리멤버리까지, 내가 꼬박 2일간 그레이 부부의 곁을 지켜야만 한다는 게 우리 엄마의 의견이었다. 아마도 엄마는 그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비단 그의 죽음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로서가 아니라, 그의 오랜 친우이자 연인으로서도. 

엄마는 내가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으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 재해에 휩쓸려 죽었고, 그 애가 살아남았대도, 그 애는 그렇게 했을 거란다. 그들도 너를 위해 이렇게 했을 거야.

 

  

그럼요, 엄마. 하지만 나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최후의 생존자일 것이다. 

현재도 마찬가지고.



장례식 첫날은 날이 좋았다. 뉴욕의 7월 초순이니 비가 올 법도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하늘은 일주일 전 그랬던 것처럼 투명하게 빛났고 잔디는 노란 볕을 받아 싱그럽게 빛이 났다. 나와는 일면식 하나 없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스트로베리 필즈 위에서, 숨결 같은 바람 아래 서서,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애도했다. 가장 앞줄에 서 있던 나는 내 손을 힘주어 잡은 그레이 부인의 작은 흐느낌을 들으면서 가만히 숨을 죽였다.    

 

나는 그 애가 없는 세상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어떤 문장도 쓰고 싶지 않았다.

어떤 삶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부인의 손을 마주 잡기만 했다. 이것은 산 자들을 위한 시간이다. 우리는 살아갈 자들을 위해 죽은 자들을 공들여 떠나보낸다. 그럼에도, 

슬픔을 덜어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가져간 사람들의 마법처럼 그녀의 괴로움 또한 짊어질 수, 있었더라면.



부인과 나 사이 흐르던 기묘한 침묵은 목사가 내 이름을 호명하고 나서야 깨졌다. 저 멀리에서 그레이 씨가 자리로 되돌아올 때, 나는 준비해 두었던 종이를 꺼내 펼치며 스트로베리 필즈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수백 개의 낯선 인영 속 저 뒤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순 없었다. 그건 비단 오랜 친구의 얼굴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천 개의 눈동자들 중 내가 지금 시선을 마주하고 싶은 건 존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입을 열어 준비해온 추모사의 첫 줄을 읊었다. 




3

리멤버리 날에는 비가 왔다. 며칠간 내리지 않은 비가 몰아서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전날 거의 말을 섞지 못했던 와일너즈도 오늘은 내 곁을 지켰다. 나는 별로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묻고 싶은 것과 답해야 할 것에는 성실하게 임했다. 우산 아래로 비 몇 방울이 튀고, 검은 드레스 밑단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을 무렵 그도 왜, 냐고 내게 물었다.

왜, 존이. 어쩌다가.

 

나는 해야만 하는 말을 고민했다. 할 수 있는 말은 아주 많았다.

그러게. 나 때문인가봐,부터 시작해서.

내가 존을 포기한 거야. 재난도, 구하지 않은 것도 모두 내 몫이었으니 원인은 나라는 이야기까지.

혹은 간단명료히 내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도 있었다.




“미안해.”

하지만 나는 고작, 이런 말로밖에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너즈에게도 못할 짓을 했어.”

 

  

비는 오래 그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부득이하게 근처 지붕이 있는 실내 추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읽을 추도문도,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수백 명의 관중도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절차 없이 모두가 서로의 손을 둥글게 잡고 죽은 자를 추모했다.  

 

오늘은 그레이 씨의 손을 잡았다. 오른손이었다. 크고 거칠었으며 붓이 닿는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그 또한 어린 아들의 여린 손을 잡았던 시절을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죄책감에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치사량의 괴로움은 아니었다.

존을 땅 아래로 묻은 그날, 나는 죽지 못한 채 집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의 무덤 위에 꽃 한 송이만을 건넨 채로. 



4

일주일 뒤, 그레이 부부가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나와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내 일상은 7월 4일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무너져 내려갔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 집 앞마당으로 차를 끌고 찾아왔을 때 내 상태는 엉망(어쩌면 건물 아래 깔린 존의 상태보다도 더. 그럴 수 있나? 싶으면서도 정말로 그랬다)이었다. 

나는 괜찮은 척을 하고 싶어서 적당한 격식 내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갈아입고 마당 밖으로 나섰다. 일주일 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그들은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런지 꽤 됐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마법사라는 것은 도무지 말할 수가 없었다. 존이 죽은 날이 돼서야, 나는 울면서 사실을 고백했다. 

디오르가 옳았다. 그에게도, 말했어야 했다. 내가 그와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면. 현실 속에서 내일을 약속하고 싶었더라면.

 

 

하지만 너무 늦은 후회였다.

부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존의 유언을 들었어. 떠나기 전에, 구하던 사람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더구나. 죽음을 예감한 모양이야…."

"그 애가 우리와 너에게 모든 유산을 남겼단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갖고, 남은 걸 너에게 주라고. 우리는 존의 수의에 꽂아줄 1달러를 가져갔어. 남은 것은 모두 너의 몫이라고 전해주려 왔지."

 

속삭이는 어조였으나 그 목소리가 너무 강인해서 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돈을 받거나 쓸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최선이었다. 

맞잡은 손에서 단단한 사람들 특유의 힘이 느껴졌다. 그레이 씨는 나를 끌어안았다. 부인의 포옹도 이어졌다.

 

"운이 안 좋았다, 따위의 말로 존의 죽음을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에스텔 너도 알잖니. 존도 마땅히 그렇게 했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존이 없어도, 너는 우리의 딸이야…. 언제든 편하게 만나러 오렴. 우린 널 사랑한단다."



 

미련한 사람들.

그들은 끝까지 나를 원망 한 번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살아남기로 했다.



 

5

또 그 후로 몇 달이 지났다. 

 

어쨌거나 산 사람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단풍이 물들고 날이 쌀쌀해지는 시절이 왔다. 재난재해는 여전히 선전했다. 그러나 외출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 현장에서 또 다른 '선택'을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내가 살릴 수 있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떠올리다 말았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보냈다.



9월 초 즈음, 매일 방문하던 묘지에서 쫓겨난(부부에게 들켰다. 반 년에 한 번씩만 오라고 혼이 났다.) 이후로 나는 할 일도, 갈 곳도 없었다. 엄마 아빠도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매일 함께 먹는 적막한 저녁만이 최선.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마당에 쌓인 낙엽 위로 방문객 하나가 찾아왔다. 그는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간단한 복장을 갖추고 현관으로 나오니,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구였더라.

 

내 적나라한 의문에도 아량곳 않던 그 사람은 웃으면서 내게 꽃다발 하나를 건넸다.

"파운야드 씨 덕분에 제 아내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비록 아직 다리가 낫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한 탓에 제가 찾아왔지만… 아내도 파운야드 씨께 무한한 감사를 전해달라 했습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독립기념일 때 있었던 사고… 기억하시나요."

 

기억하다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서른 명의 사람 중 누군가 나를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신문에서도 나는 '지나가던 행객의 도움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한 줄로만 언급됐을 뿐이었는데.

 

 

"...아니요, 별, 말씀을요." 

말하는 내 목소리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정말이에요.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제가 아니어도 누구나 마땅히….

 

 

정말로, 누구나.

존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꽃의 짙은 향이 나를 뒤흔들어 놓은 순간, 나는 깨닫는다.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라면. 그 자리에, 다른 마법사가 있었더라면……. 

존은 죽지 않았을 지도 몰라. 



 

내가 다른 사람들을 '선택'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존'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럼 저렇게 감사의 꽃다발을 건네는 건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나는 눈물로 그 손님을 보내고도 한참을 문 앞에 서서 가슴에 저미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잎갈나무 향이 코를 간지럽혔고, 순풍이 수호처럼 나뭇가지 사이들을 온화하게 스쳤다... 나의 노스 캐롤라이나.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풍경이었으나,

마침내 떠날 시간이 왔다.

 

대단한 낭만의 향연이었고 운명의 인도였으나 결국에 나는 가야만 하는 길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사랑을 야기하는 천 페이지짜리 소설은 없다. 모를 수 없는 운명, 보답해야 하는 사랑, 기록해야 할 문장, 그리고 스물여섯 갈래의 빛.

그 사이 하나의 삶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섭리처럼.



 

나는, 와인 오프너 없이 엉망으로 따 코르크 가루가 들어간 샴페인과 두 발로 걷는 광야를 좋아했지. 한 폭의 그림 같은 런던을 사랑했고 자주 좋아하던 추억에 잠겨 일상을 영위했다. 사랑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렸으므로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만 됐다. 충분한 인생이었던 것 같다. 이제, 이제는, 돌려주기로 한다. 

 

세상의 수많은 '써머 그레이'에게, 에스텔 파운야드로서.



 

꿈 밖으로,

다음 장으로,

세계에게로...

 

너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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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재난(건물 속 고립,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재해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할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었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골랐을 것이다.

수십억의 사람들 중 너만큼은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https://youtu.be/c8ud5h261Lg

 

AM 09:17

재앙이 대해처럼 덮친 날이었다. 적어도 그게 '세상이 붙인' 오늘의 제목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문장으로만 남겨두기에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았고, 하늘은 먹구름 하나 없이 청명했다. 햇볕 또한 과하지 않았으며 바람마저 이루 말할 것 없이 적당했다. 써머는 눈을 뜨자마자 허리 높이의 침대에서 내려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면 부드러운 순풍을 타고, 이틀 밤을 고심해서 골랐던 흰색 린넨 커튼이 뺨을 부드럽게 간지럽힌다. 창밖에서는 새가 아름답게 울었고 창가 가까이 심어두었던 잎갈나무에서 풍기는 향은 노스 캐롤라이나의 아침을 열었다... 

도로를 조깅하는 주민과 눈이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를 주고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계단을 다 내려가지 않아도 부엌에서는 새콤한 산딸기 콩포트와 베이글 향이 풍겨왔다. 이게 써머 파운야드의 일상적인 아침 루틴이었다. 

 

호그와트를 졸업한 지도 어느덧 6년. 영국을 떠난 지도 벌써 7년이 가까워진다. 바다를 건넜음에도 그녀의 완벽한 인생에는 얼룩이 지지 않아서, 그간 써머의 삶은 여지껏 그래왔듯 한 점 고난 없이 완벽하고 평탄하게 흘러갔다. 마법부가 보낸 잔챙이 마법사들, 안 보임. 끈질기게 따라붙던 기자들, 없음. 마법, 안중에도 없게 살기 성공! 이사를 끝마쳤을 때 로즈와 함께 집 반경에 쳤던 기척 보호 마법을 마지막으로 그는 마법에서 완벽하게 손을 털었다. 존을 만나기 위해 주말마다 일곱 시간씩 운전할 때면 가끔씩 마법의 편리함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사실에 목맨다기엔 써머는 지금 자신의 지팡이가 어느 서랍장 안을 굴러다니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살겠다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쳤으니 써머는 제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커튼을 바꾸고 카펫을 교체하는 것은 그 약속의 방증 같은 일이었다.

 

 

파운야드가 정착한 노스 캐롤라이나는 연이은 지진으로 황폐해진 플로리다보다는 훨씬 여건이 나은 편이었다. 서쪽에서 재앙이 일어나면 더 동쪽으로, 남쪽에서 재앙이 일어나면 더 북쪽으로... 그렇게 내려가고 내려가다 찾아낸 곳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아마도ㅡ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의견이지만ㅡ기존의 화창한 기후와 견고했던 기반이 이 지역을 아직까지 버티고 있도록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TV를 틀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보도된다. 개중에는 써머가 머무르지 않는 캐롤라이나의 어느 부분에 대한 소식도 있을 것이고. 어쨌거나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다. 그저 코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천장이 무너지지 않은 지금을 살아가는 수밖에.  

 

이토록 묘사는 가난하나 써머의 삶은 그다지 기거하는 구석이 없어서, 특유의 행운아답게 그는 7학년 이후 아직까지 제 눈으로 재해를 마주 본 적이 없었다. 지난해 새로 바꾼 크림색 에쿠스의 승차감은 좋았고,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자신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걸음이 닿는 반경마다 빛이 났고 생명이 돋았다. 좋아하는 것들은 여전히 많았고, 혼탁한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기만 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 한가운데 존이 있었다. 아주 오랜 연인.

써머는 타고난 직감으로 오늘 저녁 존이 무릎을 꿇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실 편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반지 주문서를 목격했더라면 비단 써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의 프러포즈를 예측했을 것이다. 열넷에 만나 열일곱에 연인이 되기까지, 스물셋인 지금 존은 장장 9년을 써머의 낭만으로 머물렀다. 길었지. 써머는 여전히 존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달콤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그의 청회색 머리카락 가닥 가닥에도 쉽게 시선을 빼앗겼으므로 이 관계에 부족함을 야기하지는 않았으나 존이 둘 사이를 조금 더 확실히 하고 싶다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싶었다. 존의 집 근처까지 운전하거나 그를 배웅하는 것은 즐거웠으나 이제는 조금 더 함께, 당연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모두의 앞에서 사랑을 공표하고도 싶다. 공공연한 연인에서 그치기보단, 그의 가족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써머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다간 정작 오늘 저녁에 할 말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식탁에 차려진 커피 한 잔을 들어 올리면서 써머 파운야드는 생각을 환기한다.

단정 짓고 싶지는 않지만, 감히 말하자면, 그림으로 그려낸 듯 완벽한 날이었다. 

 

 

 

PM 17:34

'뉴욕에 어서 오세요' 간판이 보일 무렵 써머는 이미 살짝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날은 무색하게 좋았으나 역시 이렇게 장시간의 운전은 체력적으로도 무리가 갔다. 그가 학창 시절에 조금 더 열의 있는 학생이었다면 차체와 함께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마법을 개발해냈을 테지만...... 얄궂은 시간은 앞으로 흐르기만 할 뿐, 돌릴 수는 없었다.

 

뭐, 어쨌거나 써머는 아주 바람직한 운전사였고 오늘도 큰 무리 없이 뉴욕에 도착했다. 창문을 열자 오후 시간대 특유의 고즈넉하고 시원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시선은 어지러운 도로ㅡ약 30개 가까이 즐비한 웨스트 가들ㅡ와 환한 도시 위를 맴돌았다. 태양은 이제 막 점심을 넘긴 것처럼 밝았고 주변 공기에도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매해 여름과 겨울마다 방문했지만 이렇게 완벽한 날씨의 매디슨 애비뉴는 첫 방문 이후 처음이었다.

 

다만 이 즈음, 써머는 이미 미친 듯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예약된 파티룸으로 직행하는 대신 가볍게 식사할 곳을 찾았다. 번화가 한복판에서 폴리 주스나 가발 하나 없이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내키지 않았으므로 그는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차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오늘은 유달리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늘 없었다, 조심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질색이니까. 오늘은 반드시 완벽한 하루가 되어야만 했다.

약속 시간은 8시였으니 아직 여유는 충분했다. 가벼운 요기 이후 존에게 연락을 보내고 주변을 둘러봐도 시간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써머는 갈아입기 위해 가져온 파란색 드레스를 앞 좌석에 올려둔 채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벗겼다. 몇 입 삼키지 않아, 몰려오는 피로에 서서히 눈이 감겼다... 

 

 

 

PM 19:52

흠칫, 어깨를 떨며 잠에서 깨어난 얼마간은 흐려진 정신을 주워 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둘러본 주변은 부쩍 어두워져 있었고, 오가는 사람도 퍽 줄어들었다. 반짝거리는 붉은 빛ㅡ아마도 전구나 낡은 간판의 빛일 거라 생각했다ㅡ이 군청색 하늘 위를 수놓고 있었고, 어디에선가 매캐한 향기가 안개처럼 흘러 들어오는 걸 보아하니...... 분명히 차 안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증거로 반도 해결하지 못한 식사가 시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 손으로는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고, 다른 손으로는 허겁지겁 드레스 봉투를 낚아챈 채로 써머는 급하게 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까운 곳에 차를 댄 것이 그나마의 천운이었다. 뛰어가면 제시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환복할 시간은 없겠지만, 식사가 나오기 전에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존도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걸음을 조금 빨리 하자 종아리에 살짝 까슬한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기분을 내기 위해 옷장에서 오랜만에 꺼낸 이 코트는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이후론 입어본 적 없는 옷이었지만, 아직도 써머에게 딱 맞았고 여전히 그의 취향을 관통했다. 주머니에서는 뭔가 차가운 게 부딪히는 감각과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이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그의 정신은 늦을 위기에 처한 약속에 전부 팔려 있었던 탓이다. 

 

너무나 익숙한 길이었기 때문에 시계에 고개를 고정한 채로 뛰어도 써머는 무사히 약속 장소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침이 이제 막 7번째 칸을 지나고 있을 무렵, 시계 끄트머리에 적힌 7월 4일이란 글씨가 공연히 눈에 걸렸다. 왜였을까. 왜, 갑자기.

 

 

 

PM 19:58

뜀박질하던 써머는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에게 부딪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고 나서야 아비규환 같은 비명 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땅은 갈라졌고 건물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조명 따위가 아니었다. 건물을 휩쓸고 있는 이것은, 이건...

 

 

 

PM 20:00

특유의 비상한 파악력으로 써머 파운야드는 대략적인 사고를 시작했다. 7월 4일, 눈에 걸쳤던 그 날짜. 뒤늦게 떠올렸으나 독립기념일이다. 망할, 유독 사람이 많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오늘 만석...... 보지 않아도 모든 방 안에 사람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오래된 호텔을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프론트 홀을 지나면 왼쪽과 오른쪽을 선택할 수 있는 갈림길이 나왔다. 존이 예약했던 방은 오른쪽 방향이다. 가장 큰 방 하나로 채워진 공간이니 오른쪽 갈림길로 향하면 기다리는 것은 존 뿐이다. 존, 그러나 존 뿐. 다른 방에는 사람들이 도사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써머는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결론에 도달하자 턱 막힌 것처럼 더는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사고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간단한 마법 주문 한 줄조차 외치지 못했다. 지금 써머가 아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저기 안에 존이 있어. 내 일평생을 바쳐 사랑해온 한 명의 남자가, 화염 속에.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 또한 저기에 있다.

 

 

 

 

PM 20:01

건물의 지반이 흔들렸고 아우성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구급차를 불렀겠지만 아득한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질 무렵이면 이미 모든 것이 늦었을 것이다.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는 지나치게 생생해서, 다소 작위적이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열기는 진짜다. 건물의 사방이 지진으로 매몰돼 함부로 대피하지도 건물 밖으로 벗어나지도 못하는 이 상황 또한 현실이다. 발밑이 으스러져가는 감각을 느꼈다. 

 

나로 인한 재해야.

그러니까 선택해야 했다.

 

 

 

 

PM 20:02

······왜 하필 오늘, 이 코트를 입고 싶었을까? 이것은 의문보다는 자책 같은 생각이었다. 써머는 사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차가운 감촉, 특유의 길이. 그는 보호 마법 이후 주머니에 넣어뒀던 지팡이를 어느 순간부턴가 떠올려냈었다. 하필 오늘.

 

왜, 하필.

정말로 운명이 나를 선택한 것처럼.

 

망설이는 사이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 너머의 어떤 기로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몸이 이끌리자 주마등처럼 많은 순간들이 기억 속을 스쳤다. 잠든 척하던 자신의 손 사이즈를 재던 존, 꽃집 앞에서 남몰래 부케를 주문하던 그 애, 부상을 당한 후에도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주던 사랑스러운 성실과...... 자신이 도착하기 몇십 분 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던 존의 뒷모습까지.

존, 정말로 사랑하던, 기억 속 그 애가 건물 안으로 상기된 채 걸어 들어간다.

 

 

페인스 그레이,

존,

나의... 존.

 

 

 

PM 20:03

써머 파운야드는 왼쪽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존. 나는......

 

사랑할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었다면, 너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만큼은.

그럼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꿈이나 환상 따위가 아니다. 운명에는 선택권이 없다. 고작해야 이런 방식으로밖에 그 애를 사랑하지 못한대도 운명을... 사랑을 바꿀 수는 없다.

세계만이 나의 등을 떠민다. 그러니 현실 속으로,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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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개의 갈래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4064/clips/141

 

Tears (by 민트데이)

Tears.

audioclip.naver.com

 

격동의 시대였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하거나 마모되었지. 천재지변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제 열일곱의 마지막 지표를 밟고 있는 써머 파운야드는 기숙사의 창틀 위에 손을 얹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과거의 회상은 그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다. 여기 열하나의 자신이 있었다. 기타를 등에 맨 채로 들어서던 이. 어렸고 작았고. 걸음걸이는 힘차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 열네살의 자신도 이곳에 있었다. 같은 걸음걸이로 걷고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영혼 그대로 돌아왔던 이. 사랑을 신봉하면서도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창문에는 열일곱의 마지막 순간이 그대로 투영된다. 머리가 조금 짧아지고 표정이 조금은 단정해진 자신.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조금은 모르겠다. 어디가 변하고 어디가 변하지 않은 걸까? 변해버린 것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해답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완벽하게 간파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받아들인 덕이다. 답지를 비워두거나, 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는 모든 질문에 답이 있을 순 없다는 걸 누군가의 조언으로 인해 배웠다. 아이러니하게도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의 정답이었다. 써머는 어느 순간부턴가 삶이 자신에게 제시하던 인생의 지표가 흐릿해졌음을 느꼈다.

 

 

마법이, 그 이름처럼 빛을 낸다.

어스름 덕에 보여야 할 길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시절에 박제 되어 있던 모습이 물에 갠 종이 인형처럼 느리게 젖어들다가 종래에는 둔탁하게 끊어지기 시작했다. 클라이막스의 피아노 연주는 진행됐고, 이제 학사모들이 던져질 차례가 왔다. 배경음으론 이름을 알 수 없는 오르골 음악들이 깔리겠지만 폭풍 같은 시대 속 영원히 행운아일 수는 없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조금씩 무너져갈 것이고...

세상이, 죽음과 삶이란 단편적 선택지를 던져준 것은 정말로 시작일 뿐이다. 시작을 알리는 총탄처럼 이제 무수한 고민들이 우리를 재단하기 위해 숨 죽여 도사린 채로 기다리고 있다. 쉬운 길은 더 이상 없다.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언젠가는 직면해야 함을 알면서도, 열일곱의 써머 파운야드가 제 친구 하나를 붙들고 기척을 죽이고자 계획하는 것처럼) 어디까지고 도망칠 수도 없겠다. 반드시 가장 어려운 문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아직은, 그 질문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짐은 가장 먼저 싸두었으면서도 나오는 건 늘 가장 늦었다. 그가 텅 비어 있던 기숙사의 문을 닫고 나온다. 우리를 투영하던 저 창문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코코아 향이 나던 말끔한 휴게실을 눈에 담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것이고......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천천히 탑의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한 칸을 내려갈 때마다 각 칸의 기억들이 잘 연사된 사진처럼 기억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 없는 마법(덧붙이자면, 사실 써머는 그 연구를 포기하진 않았다. 완성하지도 못 했지만.)의 이야기를 하며 함께 걸어 내려갔던 계단 한 칸. 바라는 가치나 증명 없이도 순수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끌렸던 계단 두 칸. 창틀 바로 밑에 놓여 있어, 서서 밤하늘을 들여다 보면 연회장과 같은 별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계단 세 칸. 결국 유성이 우리의 품 안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목걸이가 찰랑거릴 땐 달빛이 우리 곁을 맴돌았었다. 어떤 다정의 지표 위로. 

우리가 떠난 날의 밤하늘 위에는 은하 열차가 지나갈 지도 모르겠다는 실 없는 생각도 했었지. 떠나보낸 너무 많은 세계의 일부와 사랑(사전적 의미 그대로도 좋고 사랑했으나 죽어버린 것들을 칭해도 좋겠다,)같은 것들과 함께 은하수 위를 달리는 꿈을 꿨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찍을 수 없는 사진처럼 세월이 흘러간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흔들린 추억의 사진 한 장 뿐이다.

 

사실 써머는, 열일곱의 다음 장이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이 꿈 같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꽃잎이 떨어져도 남아 있는 꽃대처럼 이곳은 꿈 속의 꿈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던 탓이다. 온 몸에 비단처럼 두른 긍정, 천성 같던 해맑음 덕에 써머 파운야드는 몇 겹으로 두른 꿈 속에서 머물렀지만...... 누군가에게 말했던 대로 그는 드디어 하나의 꿈에서 깨어날 준비가 되었다. 

고집 부리지 않겠다. 그럼 언젠가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준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멋진 클래식 연주가의 조언처럼. 

 

 

이런저런 회상에 빠져 걷다 보면 이윽고 줄자로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을 계단의 마지막이다. 호그와트의 서적에 마지막으로 우리 이름이 적혔던 것처럼, 이 학교에도 우리의 발자국이 마지막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마술 같은 일이다.

그는 정성으로 피어났던 꽃들이 만개한 온실을 지나, 나뭇가지를 줍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었던 미로와 그 위를 비행했던 경기장을 지나, 푸르던 세잎 클로버 더미들과 고작 루모스 한 번으로도 충분할 만큼 눈부셔졌던 어두운 길목을 지나... 걸음을 옮겼다. 마땅히 가야만 하는 길로. 

 

복도의 지붕 아래를 거닐면서 그는 허물 같던 가벼운 고민들을 날려버리고, 지겹게 이야기하던 본질에 대한 생각을 거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마음, 누군가의 프리지아 빛 용기나 변함 없이 웃는 얼굴 같은 것들, 가르침의 선율이나 어떤 도착지를 향한 열망 같은 것들... 그게 자신에게로 온다면. 써머 파운야드로서 단 한가지, 무언가를 포기할 수 없다면...

 

단언컨대 사랑을 꼽겠다.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많은 사고가... 변하거나 마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이 좋다.

세계가 좋고,

너희가 좋고.

당신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써머 파운야드의 본질이다. 그 누구도 흐릴 수 없는 하나의 마음. 결국에는 그랬던 모양이다. 결국에는.

폭풍 같은 세월들을 지나......

 

 

짐가방을 손에 쥔 채로 복도의 말단에 도달했다. 너머로 가면 모두가 기다리고 있으니 누군가는 이 여정의 끝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다.

하지만 아쉬워할 것은 없다. 불만을 토로할 것도 없지.

 

어떤 끝은 하나의 시작이 되니까,

결국에는, 우리 모두 이 격동 같은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스물여섯 갈래의 빛을 지표 삼아.

 

 

 

추신: 졸업 축하해. 사랑을 담아서, 써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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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계, 어떤 페이지

https://youtu.be/JfRo9G4rPHA

써머 파운야드는 빈 교실에 앉아서 반짝이는 제 은빛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촛불을 불듯 가벼운 숨이 먼지를 날려버리고 나서야 그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사방은 어두웠고 자신은 혼자였다. 반사적으로 그는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한다. 사랑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 존이다. 특유의 상쾌한 민트 향과 소금끼 잔향, 호탕한 웃음, 성실한 뒷모습, 그런 것들을 그리는 것은 아주 쉽다. 어느 순간의 박제처럼 기억 속 존 그레이는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말의 심호흡 후 주문이 외쳐진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푸른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특정한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미약한 빛이다. 킨 것보다는 점멸하는 전구 같기도 하다... 빛의 인영은 물방울처럼 튀어오르기도 하고, 제자리를 빙빙 돌다 튀어오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제대로 된 형상이 요원함이 분명했다. 써머는 자신이 어떤 보호장벽을 만들어 냈었는지, 자신이 친구를 위해 외쳤던 루모스가 얼마나 또렷하게 빛을 냈었는지를 기억한다. 옅은 한숨과 함께 지팡이를 바닥으로 향하게 뒀다. 잠깐의 빛이 사그러들자 다시 암전이다.

 

 

 

두 번째로는 세계에 대한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해왔던 것들. 사람이 아니어도 그저 영위하면 즐겁고 사무치는, 그런 것들을. 일요일 아침마다 틀어지던 어머니의 레코드, 추수감사절 만찬, 물살 튀는 수영 경기장의 첫 줄 자리, 어느 날의 밤하늘과... 그 외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것들까지 전부.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건 결국 자기 자신 뿐이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자락 허락했던 것들을 전부 상자에서 꺼내듯 회상했다. 그것들은 우리가 비단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는 방식으로 마음이란 상자 한 켠에 곱게 개어져 있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이번에는 조금 더 밝은 빛이 흘러나온다. 일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교실이, 소용돌이 치는 흰 빛으로 채워진다. 눈부실 정도로 밝지만 여전히 동물의 형상은 아니다... 써머는 그것이 얼핏 방패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지팡이를 아래로 내린다. 마법이 무의식의 투영이라면, 그건 꼭 속내를 읽히는 뜻 같아 싫었다. 소중한 것들을 영원히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가슴 속에 영원토록 간직해둘 수도 없을 것이다. 결국엔 영원이란 없으니까.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다.   

 

자신을 선택한 운명은 한 발짝 뒤에서 선을 긋던 모습까지도 표방해냈다. 다시 심호흡, 빛이 힘 없이 스러진다. 

 

 

 

세 번째로 그는 너희에 대한 것들을 생각한다. 

 

스물 다섯명의 마법사. 또 다른 명칭으로는 최후의 마법사라지. 써머는 늘 키가 큰 편이었어서, 한 뼘 아래 내려다보면 보이던 어린 시절의 뒷모습들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었다. 빗자루에 타 퀴디치 경기장 위를 날고 달걀을 찾고, 날아 들어오는 편지들에는 함께 흠칫하게 되고, 삶의 모든 충격과 두려움은 함께해온... 함께였던 그런 시시콜콜한 순간들. 또 시시콜콜한 순간에 함께였던 사람들. 해링턴 교수의 두려움 속에서 언듯 마주쳤던 우리의 인영이 그려진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 기자가 찍었던 사진을 떠올리기로 했다.

사진 속 몇몇은 웃고 있었고 몇몇은 웃고 있지 않았다. 교실이 어두워 써머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목소리는 단정했고 행동거지는 말끔했지만, 결국엔 떨리던 손을 타고 묵직한 섬광이 흘러나왔다. 눈이 부셔서 써머 파운야드는 꽤 오래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서는 찰박거리는, 물 튀기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면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눈을 뜨니 푸른 빛의 돌고래 하나가 일전 빛이 맴돌았던 그 방향으로 도는 것이 보였다. 파편 같은 어떤 파도 조각들이 어스름처럼 텅 빈 교실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순간 써머는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도무지, 도무지 포기하지 못할 것들을. 이건 이미 자기 삶의 일부다. 떼어낼 수가 없다.

함께한 페이지를 찢어낸다고, 글자를 지워본다고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두고두고 화자될 이름들. 이건... 이미 자신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건 마법 또한 마찬가지다.

 

정말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이제는 받아들일 때가 왔다. 이제는. 이제는... 

 

 

 

힘 없이 빛을 꺼트린다.

어떤 미련함만이 여기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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𝑼𝒏𝒄𝒐𝒏𝒕𝒓𝒐𝒍𝒍𝒂𝒃𝒍𝒆 𝑺𝒆𝒏𝒕𝒆𝒏𝒄𝒆

[포기할 수 없는 문장]

 

 " 멋진 꿈이야. "

 

-여전히, 꿈처럼 제련된 미소. 걸음걸이에는 빛의 어스름이 깃들었고, 손동작은 마법이 과거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다. 한여름 밤 속 어느 순간에 아로새겨져 있는 모습으로······  시선에는 반짝이는 환상이 사로잡혀 있다.

-성장은 육학년 즈음 차차 멈췄으나, 여전히 성장통을 호소하는 밤들이 있었다. 여전히 특징적인 큰 손 발과 뚜렷한 이목구비. 이제는 어색하지 않게 키와 잘 어우러진다. 

 

-치마 안으로 넣어 입은 품 큰 와이셔츠와 군청색 끈 구두, 느슨할지언정 정자로 맨 넥타이. 입에 점, 손에 반창고, 팔에는 헐렁한 깁스, 풀잎 향기·······. 달라질 듯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지지 않은 듯 달라졌다.

 

-단발 머리_ 몇 주 전,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거의 평생을 길러왔던 만큼 아직도 머리카락을 넘기려는 헛동작이 남아 있다. 심경의 변화랄 건 없었다. 그러니 슬픔에 몸부림치던 증거 같은 게 아니란 뜻이다. 이건 그저······.

-깁스_ 복잡할 것 없이 나무에서 떨어져 다쳤다. 개학 2주 전 즈음. 병동의 반절이 문을 닫았음은 물론이요, 플루 가루조차 통하지 않으니 마법 세계에 다녀오지 않을 핑계는 충분했다. 머글 병원에서 머글 식의 치료를 받았고, 회복은 조금 빠른 편이었다. 무더위가 가실 즈음이면 붕대를 풀 것이다.

 

 

 𝐒𝐮𝐦𝐦𝐞𝐫 𝐅𝐨𝐮𝐧𝐝𝐲𝐚𝐫𝐝 써머 파운야드

혼혈

래번클로

17세•여성

171cm / 57kg

영국•미국 이중국적

 

 

“그 기민한 눈, 돌진하는 자질, 숨기지 못할 생기, 좋다. 때마침 로웨나도 네 기지와 총명함을 속삭이니······. 새 세계의 포문을 연 것을 환영한다, 얘야!

 

 

단풍나무Maple | 유니콘 털│13.5inch

유연하고 탄력 있는 지팡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뒤 은으로 도금했다. 주인 없이 혼자 기숙사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때가 많다.

 

 

 

𝐏𝐄𝐑𝐒𝐎𝐍𝐀𝐋

꿈 꾸는 마음•초월할 수 없는•태생 같은 포기

낡은 천을 덧대고 기워 간신히 유지해낸 드레스처럼 그의 삶에서는 아직도, 과거의 흔적이 곳곳들이 남아있다. 버리지 못한 습관과 바꾸는 대신 뿌리를 유지한 근간들. 그는 자신의 친구에게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을 배웠음에도 여전함을 표방하며 살아가기를 택했다.



꿈 꾸는 마음

비단 같은 마음, 어떤 돌풍 같은 운명, 린넨 커튼 향기…. 여전히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향기로운 꿈을 꾼다. 써머는 오랜 전조를 거쳐 드디어 이야기의 절정 속으로 초대 받았다. 이 초대는 내뱉게 되는 대사 한 줄, 행동 지시 하나마다 분에 넘치도록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사려 깊고 고아한 삶이다. 완벽한 인생, 한여름 밤의 꿈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나 모를 수 없는 것들이 있듯이, 써머 파운야드는 꿈에서 깨어나는 법을 알고 있다.



초월할 수 없는

태생부터 정해져 있던 한계선이 있어서, 오랜 시간 끝에 그는 ‘써머 파운야드’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태어난 이상의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는 변할 수도 달라질 수도 없었다. 많은 것들이 그대로다. 

들기 시작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스스로가 도무지 변화를 추구할 수가 없게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고난과 역경에 맞서 싸워 새 시대를 요구할 배짱이나 담력 같은게 전혀 없는 채로, 써머는 여전히 세상이 제시하는 방향 중 가장 쉬운 것을 선택한다···. 가장 쉬운 길. 버티거나, 무시하거나, 포기하거나. 패배는 포기보다 짙은 성질을 지니고 있어 고작 3년만에 써머를 완벽하게 길들여 놓았다.  

 

물론 삶의 주인인 그 또한 가끔씩, 따분함을 느끼는 것도 같았다.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사색에 잠기는 시간들, 무료한 표정들이 그의 세월을 증명했다·······. 하지만 벗어날 길은 없다. 감히 그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단단히 고정된 페이지 저 멀리로, 바람이 분다. 서부의 바람이·······.



본능 같은 포기

여전히 포기가 호흡처럼 쉽다.

 

의견이 뚜렷할 뿐, 주관이나 고집 자체는 약한 편이다. 없는 것은 아니나 싱겁다 해도 좋겠고 쉽게 꺾인다 해도 좋겠다. ‘되지 않을 일’은 여전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체념조차 손쉬워서 ‘가능성’만이 열린 일은 망설인다. 그러나 자신의 주관을 포기할지언정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필요하고, 실패하지 않을 일들이라면.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예전에 비하면 능동적인 성격이 많이 죽었다지만, 사실 자세히 파고들면 그는 처음부터 눈부신 세상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왔을 뿐 그것을 소유하거나 등 뒤로 이끄려고 군 적은 없었다. 써머 파운야드는 여전히 자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한다. 포기는 파악력이 이끌어낸 부작용이다. 길들여졌으니 이제는 본능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 포기가 달가웠던 적은 없었다. 그래야 했음을 알고 있음에도,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법’을 모른다······.



 

𝐎𝐓𝐇𝐄𝐑𝐒

𝐄𝐬𝐭𝐞𝐥𝐥 𝐒𝐮𝐦𝐦𝐞𝐫 𝐅𝐨𝐮𝐧𝐝𝐲𝐚𝐫𝐝 에스텔 써머 파운야드

Estell |  본래 에스텔,이라고 읽지만 써머는 자신의 이름을 에스텔, 라- 라고 길게 발음을 빼 발음한다.

-어머니께서 그러셨대,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애는 써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으셨다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지어두셨던 이름을 멋대로 바꿔버릴 수 없어 '서류 상에는' 에스텔을 퍼스트 네임으로 기입했지만 모두가 그를 써머라고 부르고 그 또한 써머라는 이름에 뒤돌아본다.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그는 마땅히 이 이름 또한 당신에게 내어줄 것이다.

 

Summer |  한여름 내리쬐는 태양처럼 뜨겁다기보단 차가운 계곡에서 튀겨오는 여린 물살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제 어떤 여름에는 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배웠다.

 

Foundyard |  아버지는 영국 출신 머글이시고, 어머니는 미국 출신 혼혈 마법사. 외할머니가 머글본 마법사, 할아버지는 머글(미국에선 노마지라 부른다지?)이셨던 걸 생각해보면 마법의 계보가 그리 긴 집안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머물렀지만 마법의 기류가 거세지던 몇 해 전부터 영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가업이랄 건 없지만, 이 집안사람들이 모두 예술업에 종사하듯······ 써머 역시 화가이신 아버지와 포크송 가수이신 어머니의 끼를 고루 물려받았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예술은 그의 천성이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

마법_ 관심 없다.

알아듣지 못했다면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도록 하겠다.

필요 없다. 이제 이런 것은.

 

행운_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 여전히 남서부 최고의 행운아! 행복과 행운과 운명을 적절히 섞은 금가루가 전신에 뿌려져 있다. 많은 것들이 뒤따르는 삶.

 

사랑_ 벌써 세 번의 여름과 겨울 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뺨이 붉게 물드는 것. 고작해야 어절 하나가 이토록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니! 진정한 마법을 골라보자면 써머 파운야드는 망설임 없이 이 쪽을 꼽을 테지만 가엾게도 세상은 사랑을 모르게 하는 불행에 사로잡혀 있다······.  

 

가족_ 6학년 겨울, 어머니가 마법을 잃으셨다. 전조 현상이 길었으므로 누구도 놀라지는 않았다. 파운야드는 아주 옛날부터 마법 없는 삶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삶에 큰 변화가 나타난 점도 없었다. 어머니는 이제야 조금 홀가분하다며 웃으시곤 과거 자신이 다루었던 힘들에 대해 전부 잊어버리셨다······. 

마법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법사들은 조금 붕 뜬 존재가 된다고. 그제서야 비로소 누군가의 말을 이해했다. 

 

존_ 연인. 그와 있으면 한낱 로맨스 소설의 아류로 남아도 좋겠다, 싶은 날들이 많았다. 마법이 써머 파운야드의 삶을 침투할 수록 에스텔 파운야드는 그에게서 새 삶의 궤적을 찾는다······.  

마법사임을 은연 중에 언급했으나, 마법을 직접 보여준 적은 없었기 때문에 뾰족하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거부 당하지는 않았지만 종말이니 별종이니······, 구태여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의 이런 유한 태도는 마법의 실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혹여나 존 앞에서 마법을 써버리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때문에 마법에 관한 모든 것들이 집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하면 마법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포기한 것들

마법_ 정확히 말하자면 성적. 아니면 마법을 영위하고자 하려는 노력? 어차피 사라지지 않을 힘이라는 써머 파운야드의 직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사라지란 저주가 통하지 않으니 외면하고 내버려두는 수밖에.

내버릴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곤 전부 포기했다고 봐도 무방해서, 지팡이를 마지막으로 쥔 건 몇 달 전이었고 방학 도중에는 그를 집으로 가져가지조차 않았다. 수업에서는 거의 얼굴을 보기가 어렵고 걸음은 얼마나 잽싼지, 이리저리 교수들을 피해 도망치는 일에는 도가 텄다. 

 

O.W.L은 고대 룬 문자(E), 신비한 동물 돌보기(E), 약초학(A), 변신술(A)을 제외하곤 전부······ 낙제했다. 수업에 들어오질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긴 했다. 시험을 제대로 치긴 했을까? 어쩌면 중간에 한 두 과목은 깜빡하고 들어가지 못했거나,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럴 만한 위인이니까.

일찍이 배움을 포기했으므로 통상적 7학년에 비해 아는 것이ㅡ이론적으로ㅡ많이 없다. 능력이 부족하진 않았겠지만(그야, 그도 결국엔 세간에서 떠들어대는 마지막 마법사니까), 마법은 주문을 외치지 않으면 발현되지 않는다. 지팡이를 쥐어 무엇 하겠는가? 그는 외칠 말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펜잰스_ 이것도 정정하자면, 포기’당했다.’ 초기 재해를 비껴나갔던 만큼(적어도, 그가 알던 바로는), 많은 재난들이 빗장이 제거된 빗물마냥 급격하게 몰아쳤다. 집이 바다에 잠겼고 또 그대로 얼어붙기도 했다가, 종래엔 대들보 하나가 썩어 무너졌다. 런던으로 몸을 피하던 것도 하루 이틀······. 터를 옮기자는 부모님의 결정 덕에 7학년으로 올라오기 전 여름은 전부 미국에서 할애했다. 

어느 때든 편지는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플로리다에는 부엉이가 잘 날라다니지 않으니까.

 

퀴디치_ 마지막 경기 날, 빗자루를 쥐고 훌쩍거리던 스스로의 모습을 잊은 것처럼 그는 이제 기숙사 구석에 가지런히 세워둔 빗자루에 시선 한 줌 주지 않는다. 그래도 그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제 어머니처럼 후련하게 웃고 잊어버릴 수 있는 그릇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ETC.

9월 12일, 내리쬐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스멀스멀 가시기 시작할 무렵 태어났다. 그날 유달리 파도는 높게 쳤고...

Clematis | 당신의 마음은 진실로 아름답다

Sapphire | 성실과 진실

 

-조금은 습관처럼 느껴지는, 억양 없이 둥근 미국식 말투. 중간중간 영국식 발음이 튀어나오는 면이 남아있긴 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높고 밝으나 억양은 사뭇 나긋해졌다. 

-수준 급의 기타 연주. 어머니와 합을 맞춰도 크게 뒤쳐지지 않는다. 가끔은 작사에도 몰두한다.

-맴도는 오렌지 향기.

 

-여전히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습관.

-부엉이 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 편지를 기다리기보단, 그곳의 공기를 좋아했다.

-’모르겠다’고 말해버리는 새로운 입버릇. 요컨대 무지의 인정. 비관 따위가 아니라······ 솔직함 쪽에 가깝다.

 

-성인이 되자마자 딴 면허로 올해 여름, 온 매사추세츠를 누비고 다녔다. 기종은 새빨간 포드. 미국의 차고에 두고 돌아왔다.  

-로맨스 소설은 몇 해 전 졸업했다.

-아직도 되고 싶은 것은 없지만, 꼭 무언가 되어야 한다면······.

 

L: 수영 경기, 눈 오는 런던과 맑은 개울, 오렌지 농장, 래번클로 휴게실, 꽃들이 수놓인 들판들과 그보다 촘촘하게 채워진 객석.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일부들이 좋다. 자기 인생과, 당신, 그리고…, 그리고 존. 

H: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시선이 증명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기필코 자기 목소리로는 내뱉지 않을 하나의 단어.

 

 

 

TEXT

인도자와 이끌..., 잠깐, 난 이끌리겠다고 한 적 없...

에스텔 써머 파운야드 & 와일너즈 카일런

4년의 시간 사이에도 사랑의 힘에 대한 맹신과 질색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사랑의 전파는 이제는 내기의 형태가 아닌, 인도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어떤 설렘은 마음을 치유해주기도 하니까. ...아직은 조금 일방적인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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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걸 알려줄 순 없지.

yunicorn